사순절 설교, 요 18:1-11, 내가 그니라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의 여정을 걸으며 우리는 점점 더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묵상하게 되는 본문 가운데, 요한복음 18장 1절에서 11절은 예수님의 체포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서사로 흐르는 체포 기록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순종, 유다의 배신, 제자들의 혼란,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직면하게 하며, 고난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내면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주 모이시는 곳이므로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8:1-11)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이 인간의 배신에서 비롯되었고, 그 배신조차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종과 그 내면의 결단이 얼마나 깊고 복된 것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사순절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며,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드러남임을 고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유다의 배신과 인간의 부패 (요한복음 18:1-3)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으로 들어가신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 동산은 예수님께서 자주 기도하시며 제자들과 교제하시던 장소였습니다(요한복음 18:2). 그런데 그 장소를 유다도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친밀함의 장소가 배신의 현장이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외부의 적이 아니라, 예수님과 떡을 나누고 말씀을 들으며 함께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요한복음 13:18). 그런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의 하속들을 이끌고 횃불과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요한복음 18:3). 이 장면은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자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배신은 단지 개인적 일탈이나 실수로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 내면의 부패함, 곧 전적 타락의 실상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진리를 거스르고, 자기 유익을 따라 살며, 때로는 가장 고귀한 것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짓밟는 존재임을 유다는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순절의 첫걸음은 바로 이 사실을 마주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도 유다와 다르지 않다는 자각, 나도 은 삼십에 진리를 팔 수 있는 존재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주권적 자기 헌신 (요한복음 18:4-6)
예수님은 체포 당하시는 그 순간에도 결코 수동적인 희생양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자발적이며 능동적으로 그 시간을 맞이하십니다.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모르고 맞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먼저 나아가 묻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은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라."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요한복음 18:5)
이 말은 단순한 신원 확인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즉 '나는 있다'는 이 표현은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한 언어 구조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요한복음 18:6). 이는 하나님의 권위 앞에 모든 피조물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고,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시며,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이 헌신은 자발적이며, 구속사의 중심을 이루는 사랑의 결정입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이 자기 비움, 이 자기 헌신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제자들을 위한 보호와 대속의 본질 (요한복음 18:7-9)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무리들에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다시 "나사렛 예수"라 대답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요한복음 18:8).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잡히심으로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친구를 향한 배려가 아니라, 구속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 된 자들을 위해 잡히시는 것,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들의 자리에 대신 서시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본질입니다.
9절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한복음 18:9). 이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고, 이는 우리 모두를 위한 예표가 됩니다. 우리는 그분이 잡히심으로 자유를 얻었고, 그분이 버림받으심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칼과 예수님의 길 (요한복음 18:10-11)
그 순간 베드로는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내리칩니다. 그는 예수님을 지키려는 열심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요한복음 18:11)
예수님은 인위적인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주신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순종의 길임을 아셨고, 기꺼이 그 길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칼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칼을 멈추게 하시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길은 외로운 길이었고, 배신과 침묵, 조롱과 채찍이 기다리는 길이었지만, 그 길 끝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뜻이 있었습니다.
결론: 주의 고난을 동행하며, 주의 이름을 고백하라 (히브리서 1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요한복음 18장의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이 단순한 불행이나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 계획 가운데 준비된 사랑의 길이었음을 증언합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은 배신을 경험하셨고, 홀로 감당하셔야 했으며,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게이지 아니하시더니..." (히브리서 12:2). 예수님은 자신이 겪을 고난과 죽음의 깊이를 아셨지만, 아버지의 뜻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잔을 마시셨습니다.
이 사순절, 우리는 유다의 배신을 보며 우리 안의 죄성을 돌아봐야 합니다. 베드로의 칼을 보며 우리의 성급함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내가 그니라"는 말씀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순종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하여 잡히셨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잔을 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잔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그분을 따라가는 고난의 길, 그것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을 주님의 발자취와 함께 깊이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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